
『명랑한 유언』
구민정, 오효정 지음, 스위밍꿀 펴냄
생과 우정의 신비로움
『명랑한 유언』을 읽은 건 나의 14세 추정 고양이 파씨와의 이별을 준비하던 무렵이었다. 왜 이별을 준비했느냐면, 수의사가 파씨에게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이별을 준비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준비라.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그것까지가 파씨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하면 외면할 순 없었다. 나는 집 근처 동물 장례식장을 검색했고, 사후 경직이 오기 전 취해야 할 행동 요령을 알아보았다. 유골의 거취 문제에 다다랐을 땐 왜인지 화가 났다. 들쑥날쑥, 하루에도 몇 번씩 슬픔과 자책과 희망을 오가며 나는 두려웠다. 두려움은 얼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얼음이 된 채 파씨의 지정석이 된 구석진 소파 자리, 그 옆에 앉아 종일 책을 읽었다.
이 책을 읽어도 될까? 『명랑한 유언』의 리뷰와 책에 대한 정보들이 떠올랐다. 슬프다, 울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던 유망한 PD, 위암 4기 판정을 받고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여정. 내 상태가 상태인지라 이 책이 진을 빼놓을 것 같아 겁이 나기도 했지만, 표지 속 나란히 한 길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다. 표지처럼 책의 구성도 다큐멘터리를 공동 제작하며 만난 오효정과 구민정, 두 사람의 에세이가 교차하며 나아가는 방식이었다. 책의 초반부엔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자라던 어린 시절이 나온다. 공통점이 있다면 두 사람 다 ‘PD’를 꿈꿨다는 건데, 참 신기한 게 이후의 일상이 다른 듯 비슷한 결로 흘러간다. 꿈이 일이 되고, 일이 삶이 되고, 일하다 만난 서로가 우정을 이어 가고…… 그러다 ‘항암’이라는 낯선 단어가 등장하며 두 사람의 풍경이 달라지고.
읽으면 읽을수록 놀라움의 연속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두 사람의 관계성과 의연함에 대한 의아함이었다. 가령 그들의 미국 여행기에서 독자인 나는 환자로서의 오효정의 상태에 노심초사했는데, 에세이 속 두 사람은 서로의 상태를 살피면서도 무리해서 야경을 보러 가는가 하면 쇼핑을 하다가 지쳐 다투고, 또 화해하고, 일정을 바꾸고, 잠을 잤다.
우정이라는 건 어떤 의미의 관계일까? 혈연보다 연약하고, 사랑보다 뜨겁지 않다는 점에서 나는 우정이란 덧없이 흩어질 수 있는 인연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각자의 시간 속에 서로를 남겨 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 읽었을 때, 나는 ‘우정이란 생각보다 끈끈한 것이구나’하는 생각 대신, 우정이라는 관계가 가진 연약함이야말로 신비로움의 비결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관계성은 마치 삶과 죽음이 함께 빛나는 이 세상의 이상함과도 참 닮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파씨를 ‘친구’라고 불렀다. 따지고 들자면 내가 보호자면 보호자고 엄마면 엄마지, 친구라는 건 성립될 수 없는데 왜 그랬을까. 내가 위경련으로 응급실에 다녀온 어느 새벽, 파씨는 내 배에 ‘꾹꾹이’를 해 줬다. 홀로 티비를 보고 있으면 가까이 와 무릎에 머리를 기대기도 했고, 슬픔에 싸여 침대에 누워 있을 땐 얼굴에 재채기를 해 몸을 일으키게 하기도 했다. 파씨는 슬프더라도 할 건 하기를 원하는 것 같았고, 그런 파씨 덕분에 내 일상이 다양한 장면으로 풍성해졌듯, 파씨의 일상에도 나라는 존재가 있겠지. 파씨도 그 푸른 눈으로 나를 보았고, 신뢰의 표시로 내 목덜미를 지그시 밟았고, 누워 있는 내 입가에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완벽한 이해, 소통, 네가 나보다 먼저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나눈 시간보다 중요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떠나는 이와 남겨진 이. 『명랑한 유언』이 슬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픔이 전부인 것은 아니었다. 얹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게 해 주는 이 책을 덮으며 나는 두려움을 내려놓고 파씨와 나눈 연약한 우정의 장면 곁으로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글쓴이 김유나
1992년 출생. 2020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경장편소설 『내일의 엔딩』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