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이전의 책』 (Prebooks)
브루노 무나리 지음, Corraini 펴냄
책 이전의 책
브루노 무나리를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할 수 있을까? 피카소가 브루노 무나리를 현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칭한 것처럼 순수 예술과 디자인, 그림책을 포함한 다방면에서 활약한 그를 하나로 정의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브루노 무나리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교육자에 가깝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그는 폐쇄적 미학이나 개념 과잉보다는 명료하게 소통하는 것을 선호하였고,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기보다는 스스로 탐험하고 발견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육자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책 이전의 책』은 12개의 작은 책으로 이루어진 세트인데, 모든 책은 각기 다른 재질과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무, 끈, 펠트, 비닐 등 다양한 재료 위에 다양한 방식으로 이미지를 구성하면서 일반적으로 종이 위에 인쇄되는 그림과 텍스트가 아닌 다양한 물성으로 책 그 자체를 보여 준다. 현재 판매 정가는 190유로로, 일반적인 책에 비해 비싼 가격이다. 하지만 브루노 무나리는 분명 대중을 위해 기여하고 소통하는 물건으로 남기고자 이 작품을 책의 형태로 만들었을 것이고 『예술가와 디자이너』에서 말하는 것처럼 디자이너로서 어떤 물건의 기능을 벗어나거나 아름다움을 위해서 비용이 증가하는 것을 지양했을 것이다. 이 책을 단순히 책의 물성을 이용한 미적인 측면으로만 집중해서 본다면 본질적인 의도를 간과하기 쉽다. 브루노 무나리는 이 점을 오독하지 않도록 책의 뒷면에 이 책의 '목적'에 대해서 명백히 적어 놨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이와 브루노 무나리가 책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문답 형식으로 대화가 이어진다.
아이는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무나리는 여러 장의 페이지로 묶인 물건이라고 대답한다. 아이가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냐고 묻자 무나리는 보통 글자가 들어 있는데 글자만 늘어놓으면 1마일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대화를 이어가다가 아이는 책의 용도를 물어본다. 무나리는 재미를 위해서 또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 사용한다고 하며, 어떤 식으로든 지식을 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은 문화적 도구이자 시적인 매체로,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지식을 흡수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며,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도 책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이 책을 만들었다고 명시한다.
브루노 무나리는 명확한 목적으로 이 책을 '디자인'했다. 그는 모더니즘적 관점에서 기능을 중시하는 디자인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책은 양산품으로, 광범위한 불특정 다수인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에 입각해 설계되고 대량 생산된다. 그는 적절한 기술과 알맞은 재료로 제작하여 내포된 메시지를 많은 사람에게 직접적인 방법으로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양산품의 기획자는 전달하고자 하는 예술적 이상을 위해 작업을 하지는 않다고 말하며, 현재의 재료와 기술을 실험해 그것으로부터 하나의 양산품을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추출한다고 했다. 진정한 의미의 양산품은 저가이며 무제한의 개수를 갖는다. 또 그것들은 새로운 형태의 미학적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예술적 문제의 탐색보다는 시대적 요구에 자연스럽게 순응한다고 말한다. 그의 책들은 물성을 이용한 기준으로 지금까지 중요한 레퍼런스로 이어지고 있으며 책의 정의를 환기한다.
요즘 다시 이 책의 명료한 정의를 되새김질하는 이유는, 시대를 앞서 꿰뚫어 봤던 선구적 통찰이 지금의 시대에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AI나 디지털미디어처럼 비체화되어 쉽게 휘발되는 미디어는 모래알 같은 지식이며 흡수되지 못한다. 이것들이 책처럼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지식’을 더할 수 있을까? 브루노 무나리가 말하는 ‘지식’이란 놀라움을 주는 것인데,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놀라움을 주지 못한다. AI와 디지털미디어는 이미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호기심을 빼앗아 가는 것 아닐까? 한 사람의 역량을 키우고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지식을 쌓는 일은 물성을 가진 것으로만 단단한 뼈대를 세울 수 있고 나머지는 보조적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디지털 미디어의 폐해와 물리적인 책의 상대적 우수성은 많은 연구를 통해 검증되었지만, 브루노 무나리는 그 이전에 이미 닥쳐올 시대적 요구를 통찰했다.
움베르토 에코는 『책의 우주』에서 수저보다 더 나은 수저는 발명할 수 없는 것처럼 책은 이미 완성된 형태의 발명품이라고 말했다. 나는 책이 인류 문화와 끝까지 함께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은 사라질 것이라는 마샬 맥루헌의 예언은 자신의 유명한 아포리즘인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로 반박할 수 있다. 미디어의 형식 자체가 메시지이기에 유일하게 물성을 지닌 미디어인 책만이 구조화된 사고, 지식의 누적, 비판적 읽기가 가능하며 사유의 형식 그 자체로서 강조될 것이다. 책을 매개로 삼는 창작자는 반드시 최종 결과물인 물리적인 책을 고려하고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물건을 만든다는 소명 의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쓴이 박현민
1986, 서울. 지은 책으로 『엄청난 눈』,『얘들아 놀자!』,『빛을 찾아서』, 『도시 비행』,『하얀 개』,『진정한 친구가 되는 법』,『개굴개굴 고래고래』, 『엄청난 소똥구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