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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한 미역국을 후루룩
김서해

『느리게 가는 마음』

윤성희 지음, 창비 펴냄


따끈한 미역국을 후루룩



  요즘 '피크민 블룸'이라는 게임에 푹 빠져 있다. (귀여운 증강 현실 만보기……라고 하면 될까.) 밤 10시쯤 피크민 블룸을 켜면 내가 하루 동안 걸은 총 걸음 수를 확인한 뒤 오늘의 기분 버튼을 선택할 수 있다. 눈물 버튼, 무표정 버튼, 웃음 버튼. 피크민 달력을 열어 보니 지난 3개월 동안 대부분 웃음 버튼만 눌렀다. 내가 매일 그렇게 행복했나?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다만 그런 일들 사이사이 틈입해 왔던 어떤 말과 장면이 하루 전체를 '그래도 좋았던 날'로 만든 듯했다. 좋았던 순간을 열심히 떠올리며 이완하기. 최근 그렇게 뭉친 어깨와 마음 근육을 풀어 주는 소설집을 읽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다.


  『느리게 가는 마음』은 말 그대로 느릿느릿 흘러간다. 뭉근한 불에 오래오래 끓인, 따끈하고 담백한 감자 수프처럼 폴폴 김이 나는 여덟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어진 삶 위를 묵묵하고 씩씩하게 걷는 인물들. 명랑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이야기의 행간엔 납작하게 눌어붙은 슬픔이 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과 상실, 돌연한 사고와 헤어짐에도 일상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우리를 위해 아주 잠깐도 멈춰 주지 않는다. 텅 비어 버린 자리를 희망으로, 온기로 다시 채워 주는 건 곁에 있는 사람들이다. 손가락 끝에 해를 올려 두고 영차영차 해를 밀어 올리는 아버지와 딸(「마법사들」), 전 남자친구 집에 배달 예정인 편지를 되찾기 위해 '느리게 가는 우체통'을 찾으러 떠나는 이모와 조카(「느리게 가는 마음」),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나 바닥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우는 '나'를 우산으로 가려 주는 아이들(「웃는 돌」). 윤성희 작가는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낸 일상 속 장면을 붙잡아 가장 반짝거리는 빛 조각으로 만든다. 그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순간들이 『느리게 가는 마음』에 잔뜩 담겨 있어서, 누가 괜찮다는 말을 굳이 해 주지 않아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조금씩 괜찮아졌던 것 같다. 책을 덮고 나자 내 일상이 소설 속 한 장면처럼 기록되느냐, 시간에 휘발되느냐 또한 결국 온전히 나에게 달렸음을 알게 됐다.


  「자장가」에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꼬여 있는 꽈배기는 팔고 싶지 않다는 이모가 등장한다. 꽈배기는 싫어하면서 스크류바는 좋아하는 게 모순이지 않냐고 묻는 조카에게 이모는 이렇게 말한다. "스크류바는 녹잖아. 녹으니 꼬인 게 사라지는 거지." 요즘 자꾸 모나게 굴고 다녔던 것 같아서 나도 오밤중에 열심히 스크류바를 녹여 먹었다. 너무 기를 쓰고 살면 사람이 모나진다. 모난 사람은 못난 사람. 못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니 머리에 힘을 주고, 어깨 힘은 빼자고 다짐했다. 매일매일 다짐하면 언젠가 애쓰지 않아도 물렁한 어깨를 가질 수 있겠지, 바라는 마음으로. (덧붙여 『느리게 가는 마음』을 천천히 읽으며 소설 속에 나오는 음식을 하나씩 먹어 보는 것도 추천한다. 내가 윤성희 작가의 소설을 읽고 사랑하는 방식이다.)


  『느리게 가는 마음』 속 일상 풍경들이 내게 어떤 희망을 준 것처럼, 내 일상 속 작은 풍경들이 내 피크민 달력을 스마일 스티커로 가득 채워 줄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하면 내 머리에 '윤성희 필터'를 씌울 수 있을지 골몰하고 있다. 나는 배움이 느린 사람이라서, 느리지만 집요하게 그 필터가 내 뇌와 착! 하고 달라붙는 순간을 열심히 찾아낼 것이다. 일단 종종 혼밥을 하러 가는 식당에 가 밥을 시켰다. 작품 속 인물들에게 작은 생일 파티를 열어 주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을 떠올리며. 밥을 뜨기 전에 함께 나온 미역국을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속이 따끈해지는 게 일단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글쓴이 김서해


1993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은행나무출판사에서 한국문학 단행본과 격월간 문학잡지 『Axt』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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