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차차 > 책에서 문득
비밀의 양면성 사이로
최혜진

『메멧 : 계절이 지나간 자리』

이사벨라 치엘리 글, 노에미 마르실리 그림, 웅진주니어 펴냄


비밀의 양면성 사이로


 비밀은 ‘감추고 싶은 마음’에 가까울까,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에 가까울까. 만약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거나 낙인을 찍지 않는 세상이 있다면 그곳에선 얼마만큼의 비밀이 고개를 내밀까. 두 사람이 서로의 비밀을 눈치챌 때, 그 비밀은 뜻밖의 지름길이 될까, 아니면 감당 못 할 벽이 될까.


 『메멧 : 계절이 지나간 자리』는 이런 질문을 남기는 책이다. 주인공은 채 열 살도 되지 않아 보이는 남자아이 로망과 여자아이 루시다. 둘은 캠핑장에서 우연히 만난다. 로망의 덥수룩한 앞머리 뒤엔 무심하고 날카로운 표정이 감춰져 있다. 양육자 어른으로부터 방치되어 홀로 가공식품으로 식사를 때우는데,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로망이 짓밟힌 들꽃을 어여삐 여겨 물컵에 고이 꽂아 두면 어른은 그 안에 담배꽁초를 버린다. 들꽃은 로망의 상처받은 여린 마음을 상징한다.


 루시는 일면 밝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캠핑장에서 만난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돈다. 루시의 소원은 인형 뽑기 기계에서 강아지 인형을 뽑는 것이다. 동전이 생기면 뽑기 기계로 달려가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자, 플라스틱 페트병에 돌을 채운 뒤 ‘메멧’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강아지처럼 끌고 다닌다.


 어느 날 로망이 서툴게 장난을 치다 루시의 머리카락을 잡는데, 이때 가발이 벗겨지면서 독자와 로망은 루시의 비밀을 엿보게 된다. 루시는 투병 중이다. 이 일을 계기로 로망은 일상에서 문득문득 루시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스스로가 혼란스럽다. 루시가 신경 쓰이지만, 애정인지 짜증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이 책의 강렬한 매력은 복합적 감정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고 간결하게 보여 주는 데에 있다. 어색한 몸짓, 시선을 회피하는 눈빛, 순간순간 드러나는 손짓에 두 아이의 마음이 실려 있다. 글을 최소화하고 그림으로 서사를 밀고 가기로 한 작가의 선택 덕분에 독자는 두 아이가 감추려 했던, 동시에 간절히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던 마음을 서서히 이해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비밀을 낙인 아닌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개방하고 재배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관여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연민이라는 감정에 도달할 수 없다. 상처와 외로움을 감추기 위해 뾰족한 외피를 둘렀던 로망에게 루시의 비밀은 균열로 다가온다. 처음으로 자신의 여린 자아를 마주해야 하는 로망이 당혹감을 느낀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책의 후반부는 두 아이의 서툴지만 뭉클한 교감을 보여 준다. 마음을 풀어 주려고 장난치다가 팔을 깨물고,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서 동전 한 움큼을 텐트 앞에 놓고 도망가고,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구는 로망에게 루시는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메멧’을 선물하고 캠핑장을 떠난다. 어느 여름날, 우연히 며칠을 함께하고 스쳐 간 두 사람이지만, 비밀의 양면성 사이에서 서로만 알아볼 수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말없이 이어지는 마지막 5면의 펼침면은 ‘타인을 울타리 바깥으로 밀어내기만 하던’ 로망이 어떻게 ‘곁을 내어 주고 돌보는 사람’으로 바뀌었는지 보여 준다.


 책을 읽고 나면 나의 메멧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주기 위해 반드시 합리적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 역시 알게 된다. 서툴게 서로의 메멧을 주고받은 로망과 루시처럼 섣부른 판단 대신 관여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열어 보일 수 있다면 서로의 중심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최혜진


작가 겸 에디터. 『에디토리얼 씽킹』, 『우리 각자의 미술관』,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등의 책을 썼고, 『album[s] 그림책 : 글·이미지·물성으로 지은 세계』 등 다수의 그림책 관련 서적을 번역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