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예술 토머슨』, 아카세가와 겐페이 지음, 서하나 옮김, 안그라픽스 펴냄
『노인력』, 아카세가와 겐페이 지음, 서하나 옮김, 안그라픽스 펴냄
어느 예술가의 책으로 위장한 아방가르드 실험
아카세가와 겐페이(Akasegawa Genpei, 1937-2014)는 일본 전위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60년대에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하이 레드 센터’를 결성하고, 도쿄 거리를 청소하는 행위 예술을 선보였다. 이는 국가 주도의 문화 행사를 풍자하고 비판한 사례로, 반체제적인 전위 미술의 태도를 잘 드러낸다. 그러나, 아카세가와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것은 아마도 ‘모형 천엔 지폐 사건(Mokei sen-en satsu jiken)’일 것이다.
모형 천엔 지폐 사건은 아카세가와가 창작 과정 중 천엔 지폐를 복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그는 화폐 위조 혐의로 도쿄도 검찰청에 의해 기소되었다. 처음 기소되었을 때, 아카세가와와 동료들은 대응 방안으로 ‘천엔 지폐 사건 토론회’를 조직했으며, 1966년 8월 10일 열린 첫 재판은 법정인지 전시장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광경을 연출했다. 변호인들과 미술 이론가들은 법정에서 ‘왜 복제된 지폐가 오늘날 예술의 재료이자 일부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했고, 그 변론은 동시에 현대 미술 강연과도 같았다.
과연 재판부는 설득당했을까?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설령 이것이 예술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범죄다.” 결국 수년에 걸친 재판 끝에 아카세가와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3개월의 징역형과 1년간의 집행유예가 확정되었다.
이후 아카세가와의 활동은 글쓰기로 확장되었다. 그 가운데 1987년에 출판된 『초예술 토머슨』은 결과적으로 책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개념 미술과 전위 미술의 방법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아카세가와가 정의한 ‘토머슨’은 도시 속에서 이미 기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여전히 보수·관리되는 건축적 잔여물을 가리킨다. 그는 이러한 구조물을 거리에서 발견하고 기록하며, 그 발견 행위 자체를 하나의 예술 실천으로 제시했다.
예를 들어, 아카세가와는 올라갔다가 곧바로 내려올 수밖에 없는 계단을 사진에 담곤 했다. 이 계단은 말 그대로 오르내림만 가능할 뿐, 길을 건너거나 다른 공간으로 이어주는 기능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무용하고 비효율적이며, 그저 계단의 형태만을 갖춘 대상일 뿐이었다. 이에 아카세가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런 비경제적인 것은 자본주의가 허락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사물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계단은 무엇인가? 창문 안을 엿보는 길 외에는 아무런 용도가 없는 이것을 과연 계단이라 부를 수 있을까? 계단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계단의 형태를 한 예술이다. 아니, 어쩌면 초예술이지 않을까?”
1990년대 후반 즈음에는 그의 작업에서 사진마저 사라진다. 『노인력』에서 아카세가와는 건망증처럼 나이 듦으로 인한 쇠퇴를 오히려 ‘노인력’이라 명명한다. 나이가 들어 신체와 이성의 힘이 자연스럽게 약해지는 과정을 힘을 빼는 능력, 곧 새로운 힘으로 주장한다. 제시된 사례들을 읽다 보면 헛웃음이 나오는데, 이는 사회가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노화를, 그럴듯한 능력으로 전환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카세가와의 전위성과 상상력은 여전히 흥미롭다. 그러나 미술을 좋아하고, 조형, 색채, 질감 같은 시각예술의 고유한 요소에 끌려 미술사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개념만으로 존재하는 작업을 과연 미술이라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지게 된다. 물론, 솔 르윗은 개념 미술의 정의에 중요한 기반이 된 「개념 미술에 관한 단락들」(1967)에서 아이디어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으며, 모든 아이디어가 반드시 물리적 형태를 띨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또 “개념 미술은 아이디어가 좋을 때만 좋은 것이다(Conceptual art is only good when the idea is good).”라고 말한 바 있다.
이에 질문을 조금 바꾸어 “아카세가와의 아이디어는 좋은 아이디어인가?”라고 묻는다면 어떨까. 그는 재판까지 감수하면서도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지극히 아방가르드적인 시도를 했다. 그리고 오늘날 자본주의 리얼리즘 시대에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탈자본주의적 발상을 제시했는데, 이는 그래도 제법 쓸모 있는 아이디어가 아닌가?

글쓴이 김진혁
동시대 미술 안팎에서 기획하고 연구하며 글을 쓰고 있다. 뮤지엄 학예 팀을 시작으로 갤러리, 복합문화공간과 신생 공간 등 다양한 현장에서 예술에 관한 유무형의 것을 만들어왔다. 특히 식이와 신체, 비물질 매체의 물질화, 비서구 미술사에 관심을 두며. 웹진이자 플랫폼 실험으로써 큐레이터의사생활(@magazine.curator)을 운영한다. 저서에는 『미술관을 좋아하게 될 당신에게(202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