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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노인
박연미

『노인력』

아카세가와 겐페이 지음, 서하나 옮김, 안그라픽스 펴냄


명랑한 노인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초예술 토머슨』을 읽기 전,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궁금증이 앞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제목 탓이었다. ‘초예술’이란 더 이상 쓸모없지만 건축물이나 길바닥에 부착되어 그 환경의 일부로 남아 있는 구조물 또는 흔적들을 일컫는 개념으로, 그 자체만으로 예술을 초월하는 예술을 의미한다. 작가는 표현의 범위가 다소 넓은 ‘초예술’이라는 개념에 특정 물건에 초점을 맞춘 명칭 ‘토머슨’을 붙여 ‘초예술 토머슨’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 이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는 것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시도를 보여 준다.


 ‘토머슨은 끊임없이 발견만 하는 일인데 발견에도 재능이 있고 개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이 이 말에 깊이 공감하며 그 중요성을 몸소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철학이 담긴 다음 작품을 출판사 측에서 의뢰받아 책의 디자인을 맡게 되었다. 이번 책의 제목은 『노인력』으로, 역시나 묘한 느낌을 주는 제목이다.



“노망 노인이라고 하면 왠지 쓸모없는 인간처럼 들리지만, 노망도 하나의 새로운 능력이라 할 수 있으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해 노인력은 어떨까. 그거 좋네, 노인력.

노인력.

이렇게 해서 인류는 처음으로 노망을 하나의 능력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건망증 이즈 뷰티풀.”

-13쪽


 「노인은 집의 수호신」이나 「넘어져도 그냥 일어나지 않는 힘」과 같은 글 제목에서 일반적인 노인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노인이라는 말이 주는 선입견을 ‘력’이라는 글자가 깨뜨리고, 제목과 내용 모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위트가 느껴진다. 유쾌하고 때로는 미지의 노인 이미지를 어떻게 본문 속에 담아낼지에 대한 고민이 바로 이 책 디자인 작업의 출발점이다.


 처음부터 본문 글꼴은 SM태명조를 염두에 두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단행본에서 많이 보는 신신명조에 비해 획이 굵고 닿자의 크기가 작아 초성, 종성의 속공간이 좁아 보이는 특징이 있다. 특히 ‘ㅊ’, ‘ㅎ’의 짧게 세워진 꼭지는 이 글꼴 표정의 제일 큰 특징이기도 하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한 부분이 글꼴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며, 재미있고 개성 있는 노인의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적합하다.


『노인력』 의 본문 펼침 페이지


『노인력』 의 본문 글꼴: SM태명조


 책 제목이 짧은 음절일 경우 한 음절씩 끊어 읽게 된다. (북디자인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해 온 작업자의 특성인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다.) 한 음절씩 분절된 제목자는 그만큼 힘을 얻게 된다. 하나의 낱자가 가진 아우라가 더 커진달까. 그러고 보니 제목에 이미 ‘력’이 들어가 있으니 더 들어맞는다. 힘이 커진 낱글자를 표현한다고 글자 크기를 키워 기존의 폰트로 표현하면 과격한 느낌이다. 커진 힘은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힘을 뺀 상태여야 한다. 글자가 꼭 크지 않아도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렇게 표현하기 위해 디자이너는 글자의 주변 공간을 섬세하게 설정해야 한다.) 이번 책은 글자 크기가 작아 단정한 큰 힘보다는 어느 정도 활기가 느껴지는 제목자로 생각했다. 글자보다는 이미지로 보일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본문에는 한 꼭지 끝에 이미지가 하나씩 들어가기도 하는데 일상의 한 단면을 포착해 작가만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붙여낸 것이 관찰과 발견의 미학을 보여 준다. 거리를 거닐다 마주한 장면들이라는 데서 힌트를 얻어 3음절의 낱글자를 거리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조합한 이미지 글자들로 시안을 완성했다.


거리 글자 사진 예시


『노인력』 의 표지 시안 1


 거리 글자를 수집하면서도 계속 손으로 빈 종이에 3음절을 그려 보았다. 힘을 뺀 느낌으로 굵기는 가늘게 그리다 보니 “흰 머리카락 느낌”이라고 적게 되었다. 최종안은 그 메모에서 출발하고 마무리되었다. 흰 머리카락으로 얇게 그린 노인력 글자. 대신 너무 힘이 빠져 버린 무기력한 형태는 아니어야 한다. 힘이 빠진 것이 아니라 힘을 뺀, 가볍고 명랑한 느낌이어야 한다. 그 모습은 이런 획으로 구현했다.

노트에 그려 본 노인력과 메모


흰 머리카락을 떠올리며 그린 글자, 노인력


 흰 머리카락의 느낌을 더 구현하기 위해 각도에 따라 반짝이는 은박 후가공으로 제작했다. 굵기는 머리카락처럼 가늘긴 하되, 박으로 제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굵기를 선택했다. 책 제작이 마무리될 무렵, 출판사에서 띠지를 추가로 요청하면서 저자명과 표지의 제목 글자 이미지에 크게 방해되지 않도록 반투명한 트레싱지를 택했는데, 뿌연 느낌이 또 이 콘텐츠와 맞아 보인다. 어떤 독자의 후기에서 ‘책 표지는 흰 머리카락이고 표지를 넘겨 나오는 표제지의 제목 글자는 검은 머리카락’이라는 표현을 봤다. 표제지는 흰 종이 위에 글자를 반전하여 먹으로 표현한 것뿐인데 작업자로서는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라 다시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다. (부도비라에는 표지에 쓰인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으니 이 부분도 즐겁게 발견해주길 바란다.)



 힘을 뺀, 유쾌한 노인을 선으로 그릴 때 그 선의 형태와 표정은 어느 정도의 기울기와 구부러진 모습이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직업인이라 여전히 작업하는 것이 흥미롭다. 생활에서 길어 올린 나만의 감각으로 이 콘텐츠의 꼴을 만들었으니 이런 책이 독자에게는 어떻게 가닿는지 보는 것 또한 기대되는 일이다.


 오늘 아침에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치우며 들여다보니 거울 속 내 모습에서 흰머리 한두 개가 두드러져 보인다. 『노인력』에서 반짝이는 흰머리처럼 이제는 나도 반짝하는 흰머리를 뽑지 말고, 둬야 하는 시기가 온 것 같다.



글쓴이 박연미


민음사에서 북디자이너로 근무했고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릿터>, 《밀란쿤데라 전집》, 《레닌 전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감옥의 몽상》, 《돌봄과 작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등 소설, 에세이, 인문,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디자인하고 있다. 2022년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수여하는 제52회 한국출판공로상 디자인 부문을 수상했다.

@yeonmi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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