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 옆으로, 한 발 가까이 : 가장자리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무더웠던 작년 여름, 한창 요가원에 다니던 시절의 일이다.
요가원에 들어서면 나는 습관처럼 매트를 꺼내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요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한 시간 수련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짧은 휴식, 이른바 '사바아사나' -산스크리트어로 '시체 자세'- 라는 이름의 이 시간은 말 그대로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 있는 시간이다. 죽은 듯 가만히 누워 눈을 감고 있노라면 뜻밖에도 눈물이 울컥 비집고 나왔다. 처음에는 누가 볼까 창피해 빠르게 눈물을 훔쳤지만, 죽은 자들의 공간이 된 사바아사나 시간에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걸 알게 된 다음에는 아예 땀에 젖은 축축한 수건을 얼굴에 올려놓고 소리 없이 주룩주룩 실컷 눈물을 쏟아 냈다.
그 시기의 나는 지난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맞는 자리인지 끊임없이 되묻고, 불안 속으로 깊이, 더 깊이 잠수 중이었다. 나 자신의 그러한 모습조차도 외면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가원의 그 구석, '가장자리'에 누워 있는 동안만큼은 마음이 고요해지며 억눌린 감정이 서서히 흘러나왔다. 그렇게 한바탕 눈물을 쏟고 요가원에서 나오면 제법 기분이 개운해졌다. 오늘의 사바아사나를 기억하며 '나는 죽었다 다시 살아난 거야, 다시 살아난 거야.', 끊임없이 주문을 외면서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시 여름이 찾아오니 이따금씩 그 요가원의 구석 자리가 생각난다. 처음엔 숨고 싶기만 했던 자리였지만,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무르며 내 마음속 다른 빈자리에 여백을 주었다. 그 가장자리는 감정을 흘려보내며 비우는 자리였지만, 다시 살아가는 감각을 채워 가는 자리였던 것이 분명하다.
내 마음속 '가장자리'를 찾아서
그림책 『가장자리』를 마주했을 때 나는 이미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기분이었다. 책 속 아이가 운동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 장면에서 요가원의 구석 자리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이 책이 내 마음의 가장자리를 간질이는 것을 느끼며 조금씩 책장을 넘긴다.
『가장자리』는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야 했던 아이의 이야기다. 학교도, 운동장도, 동네 골목도 모두 낯선 가운데 아이는 괜히 방학이라 텅 빈 학교 운동장의 가장자리를 걸어 본다. 그리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신이 지나온 자리마다 이곳은 어떤 자리인지, 자신만의 언어로 '가장 ______한 자리'라고 이름을 붙여 준다. 낯설었던 공간에 아이가 이름을 붙여 주자, 마치 그 자리에만 숨어 있는 비밀 같은 것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무엇인가를 발견해 가고, 교감하고, 이름을 붙여 주며 아이가 느끼는 쓸쓸함도 한 꺼풀씩 사라졌을지 모른다.
흥미로운 점은, 『가장자리』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음부터 주인공은 사실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멈춰 선 자리마다 함께해 주는 사물과 존재들이 있었다. 바람, 꽃잎, 개미, 고양이, 새……. 가장자리에 혼자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이의 주변에는 늘 아이의 마음을 채워 주는 존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고 자리에 이름을 붙여 주는 순간, 마음 한구석마다 새로운 존재들이 자리했을 것이다. '가장 먼 자리', '가장 그리운 자리', '가장 두근거리는 자리'……. 작가가 책 전반에 걸쳐 감각적으로 활용한 '가장자리'라는 단어의 말놀이와 '가장'과 '자리'라는 두 단어가 결합하면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감정의 층위는 이 책이 단순한 풍경의 묘사를 넘어서 언어로 감정을 건드리는 그림책이 되게 한다.
책 속 문장 하나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어제 가장 심심했던 자리는 오늘 가장 두근거리는 자리가 된다." 아이에게 '가장자리'는 처음에는 쓸쓸함과 외로움의 공간이었지만, 그 자리에 머무르며 마음의 위치가 달라지자 가장자리는 곧 새로운 발견의 자리로, 충만함의 자리로 변해 간다.
가장자리에 서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언제든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고, 다른 감정으로 마음을 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 아닐까. 가장자리에 서 있기에 보이는 것들, 그리고 가장자리에 서 있기에 중심을 내어 줄 수 있는 새로운 존재와 관계들이 있으니까. 『가장자리』를 읽으며 당신이 서 있는 가장자리는 어디쯤인지를 유추해 보며, 가장자리로 둘러싸인 마음의 여백에 새로운 충만함이 자리 잡기를 바란다.

글쓴이 이혜인
‘오는 것이 있어야 나오는 것이 있다.’를 철석같이 믿으며 새로운 인풋을 위해 늘 이것저것 해 보려는 그림책 작가. 그림책 『오늘 더 다정해져요』, 『너는( )고양이』, 『달팽이 달리기』,『너희가 똥을 알아?』, 『같이 씻자!』를 쓰고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