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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번역한다는 것
문주선


『오늘의 수영장』

마리나 사에스 지음, 문주선 옮김, 콤마 펴냄



몸으로 번역한다는 것


 서너 달 동안 수영장에 다녔다. 운동이 목적이 아니라 번역이 목적이었다. 몸을 움직이러 가는 수영장과 말을 옮겨야 하는 번역이라니, 이 정반대의 조합에 대부분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하지만 몸을 움직여야만 비로소 말이 따라오는 책들이 있다. 이런 책들은 책상 앞에서만 번역할 수 없다는 걸 종종 느낀다. 그림책이나 그래픽노블 번역이 특히 그렇다. 글과 그림이 함께 이야기를 만드는 이런 장르는 글이 직접 말하지 않는 감정과 동세가 그림에 담겨 있다. 번역자가 그림이 하는 이야기를 놓치고 글만 옮긴다면, 책에 흐르는 감정과 분위기, 온도와 리듬은 상실된다. 그것을 옮기려면 몸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책일수록 소리 내서 읽고 들어 보고, 인물을 따라 몸을 움직여 보고, 비슷한 환경에 놓여 보면서 옮기려고 한다.


 그래픽노블 『오늘의 수영장』도 몸이 말을 부르는 책 가운데 하나였다. 주인공들이 뿜어내는, 시선에서 벗어난 자유로움과 주름을 이기는 당당함, 너스레 섞인 다정함이 그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언어처럼 다가왔다. 그 언어를 온전히 옮기려면, 당장 그들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더불어 화려하고 선명한 색감의 그림이 물을 밀어내고 나아가는 낯선 속도감, 물에 기대어 움직일 때의 느슨한 해방감, 물속에서 흔들리고 뒤엉키는 몸의 약동감 같은 감각들을 일깨웠다. 몸으로 감각하지 않고 이 책을 옮긴다면, 장면마다 흐르고 있는 어떤 기운이 빠져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서너 달 동안 아쿠아로빅 수업을 들으러 동네 수영장을 오갔다. 성역 없는 야한 농담과 호탕한 웃음, 눈치 보지 않는 자유분방한 몸짓, 그리고 거침없는 잔소리와 참견이 오가는 노년 여성들의 수영장. 그들은 유쾌함과 불쾌함, 무례함과 다정함의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모든 것이 상대를 향한 관심과 애정에서 오는 자매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과의 경계는 어느새 흐려지고, 관계는 물살을 따라 유연하게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그들의 눈빛과 숨소리, 몸짓을 익혔다. 그것들을 문장 속에 담고 싶었다. 단어를 고르는 데서 끝내지 않고 그 말을 어떻게 툭 뱉었을까, 어디에서 숨을 쉬었을까, 어떤 제스처를 지으며 건넸을까를 떠올리며 옮기게 되었다. 몸으로 번역하는 일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동안 막연히 실천해 오던 감각들이 번역의 보조적인 수단이 아니라, 어쩌면 본질일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의 수영장』을 옮기면서 새삼 깨달았다.


 물론 이런 식의 번역이 언제나 가능한 건 아니다. 비인간의 내면이나 시간성이 상실된 세계처럼 상상력과 언어 감각만으로 가닿아야 하는 서사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상에 쫓기다 보면 책마다 몸을 움직이고 감각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몸을 움직이고 감각을 사용해 문장을 옮기면, 조금 더 살아 있는 말, 조금 덜 번역된 말이 가능해지는 것 같다.


 몸이 말을 거는 책은 번역가의 몸을 책 밖으로 불러내 삶 속으로 이끈다. 『오늘의 수영장』을 번역하는 동안, 나는 번역이란 타인의 삶을 살아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에는 물속에서 웃고 떠드는 장면들 사이로 삶과 죽음, 가족과 친구, 과거와 현재가 출렁인다. 나이 든 몸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오늘을 통과해 나가는 노년 여성들의 모습은 어느새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머지않아 노년이 될 나와 내 친구들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스페인이라는 배경이 낯설 법도 하지만, 전통적인 성 역할 아래 가족주의와 가부장적 문화 아래에서 살아온 여성들의 정서는 지금 여기의 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을 옮기는 동안 내 엄마와 이모, 친구들과 나를 자꾸만 겹쳐 보게 되었다. 이 책은 그렇게 여성의 말과 몸, 삶의 결을 깊고 다정하게 끌어안는다. 그리고 나는 그 결 속에서 책을 옮길 때 몸과 말과 삶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눈앞의 문장을 옮기기 전에, 그 문장을 먼저 살아보는 일, 몸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글쓴이 문주선


어린이책 편집자이자 번역자입니다. 좋은 사람이 좋은 독자가 되고, 좋은 독자가 좋은 책을 만들고 옮길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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