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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짜이자 가짜이다
조아란

소설 쓰기 싫은 날

오한기 지음, 민음사 펴냄


우리는 진짜이자 가짜이다


 올 한 해 일로든 사심으로든 꽤 많은 책을 읽었는데, 이상하게도 자꾸 ‘문득’ 떠오르는 책이 하나 있다. 더 근사한 메시지를 가진 책도 많았고 더 감동적으로 읽은 책도 있었을 텐데, 치열하게 읽지도 않았고 크게 감명받은 것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계속 생각나는 책. 문득 누군가에게 무심히 권하고 싶은 책. 바로 오한기 작가의 『소설 쓰기 싫은 날』이다.


 이 책은 소설가와 시인들이 자기만의 문학론을 에세이·일기 형식으로 풀어놓은 민음사 <매일과 영원> 시리즈의 최근작이다. 평론보다 말랑하고, 삶과 문학의 경계가 서로 자연스럽게 스며있는 글들이라 좋아하는 시리즈다. 무엇보다 문학을 논하지만 논문처럼 형식을 갖추지 않고, 진짜 소설가의 말투와 성격 그대로 쓰여 있어 ‘아, 쓰는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를 바로 곁에서 듣는 느낌이 든다.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소설 이후의 일상’을 보여 주고, 쓰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나도 쓸 수 있나?’ 하는 기대를 반쯤 품게 하는.


 하지만 이 리뷰를 쓰는 지금도 나는 오한기 작가의 소설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 화제작 『인간만세』를 사두었지만 손이 가지 않았고, 정작 문학론 에세이인 『소설 쓰기 싫은 날』을 먼저 읽게 되었다. 아마 ‘하기 싫다’는 부정문에 더 끌렸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고 애쓰는 일상은 정작 하기 싫은 일들로 이미 꽉 차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아무튼 줄거리만 보면 단순하다.

매일 같은 길로 작업실에 출근하는 오한기. 한숨이 절로 나는 원고 검토, 팀장님 눈치 보기, 욕하기, 징징거리는 배우의 비위 맞추기, 유치원생 딸 주동과의 대화, 아내 진진과의 일상.

소설 한 권 읽어보지 않은 작가의 소설론 에세이를 먼저 읽는다는 것도 좀 탐탁지 않은데, 초반에는 대충 써 내려간 일기 같은 기분이 들어 살짝 심드렁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한 문장쯤은 걸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관성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데, 갑자기 오한기 작가의 작업실 화이트보드에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오한기가 이러니까 개새끼지.”

……뭐?

이에 오한기 작가도 당황해 묻는다.

“Who are you.”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작업실에 남겨진 메시지.

독자인 나도, 작가 본인도 당황스럽지만 그냥 읽어 나갈 수밖에 없다. 무서운 일이 일어났음에도 그는 일단 작업실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평소처럼 메일함을 열어 메일을 읽고, 팀장에게 출근 보고 메시지를 보내고, 또 잔소리를 듣는다.

그러다 자신이 재미있다고 판단한 시나리오를 팀장이 족족 반려하는 패턴에 화가 난 그는 일부러 가장 별로라고 생각한 스토리를 테스트 삼아 보낸다. 결과는? 최고의 찬사. 그제야 ‘왜 자신의 소설은 인기가 없을까’에 대한 찰나의 깨달음과 설명하기 힘든 현타가 겹쳐 오고, 하나의 이야기를 보고도 완전히 다른 판단이 나오는 세계에서 ‘서사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책의 리듬은 대략 이렇다.

하기 싫은 일 하기 → 현타 → 퇴근하기 → 육아하기 → 다시 현타 → 조금 재밌기 → 조금 깨닫기 → 화이트보드와 필담 나누기 → 또 별수 없이 받아들이기.

이 기묘한 리듬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직접 체험하게 된다. 오한기 작가가 소설을 쓰는 방식을, 그리고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비일상이 되는지를.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이 대체 무엇인지를.

“진짜라고 믿으면 진짜다. 가짜라고 믿으면 가짜다. 우리는 진짜이자 가짜이다.”

그 모호함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의 진짜 형태이고, 가짜인 소설이라는 장르의 정수가 아닐까(아닐 수도 있다).

아무튼, 오한기 작가는 그 경계를 아주 대충인 듯, 그러면서도 기묘할 정도로 치밀하게 흔들어 보인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이런 기대가 든다.

오늘은, 별일 있으려나?

그리고 진짜 마지막 기묘한 이야기. 오한기 작가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이메일을 주고받는 사이라는 사실을 아시는지?

궁금한 당신은 당장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글쓴이 조아란


16년 차 출판 마케터. 민음사에서 마케터/기획자로 일하며 민음사 TV, 워터프루프 북, 민음사 인생 일력 등 책을 더 쉽고 재미있게 만드는 다양한 기획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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