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젯밤에 누가 다녀갔을까?』
안드레아 안티노리 지음, 문주선 옮김, 봄볕 펴냄
진실의 영토는 입체적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속에 더 많은 진실이 있다. “시야”라는 낱말에는 “눈에 보이는 범위”라는 뜻 외에 “생각이 미치는 범위”라는 뜻도 있다. 시야를 넓히고 싶다면 생각의 시작점을 복수로 두어야 한다. 그러면 진실이 여러 모습으로 솟아난다.
『어젯밤에 누가 다녀갔을까?』는 보이는 것의 한계를 뛰어넘는 책이다. 의문 없이 받아들였던 시각의 우물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책이다. 우리는 책을 펴면 모든 의미를 일단 문장으로 수렴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은 그러기가 어렵다. 글 없는 그림책이다. 이야기는 특정 인물의 입장을 중심으로 구성되곤 하는데 이 책은 그러기도 어렵다. 초점 화자가 한둘이 아니다. 손가락으로 그림을 만지면서 이쪽저쪽에서 뻐꾸기 울음처럼 들려오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며 읽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이 책을 읽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다.
첫 장면에서 파란 배낭을 멘 턱수염 아저씨가 캠핑을 가려고 집을 나선다. 등장인물을 세어보자. 가까이 나는 새가 다섯 마리, 먼 곳을 나는 새가 일곱 마리, 나무가 열 몇 그루, 하늘에는 붉은 해가 떠 있고 지나가는 먹구름이 둘, 구불구불한 산길이 하나. 아, 다행스럽게 길은 하나다. 턱수염 아저씨가 그 길을 오른다. 앞만 보며 걷는 아저씨의 시야는 독자인 우리에 비하면 아주 좁다. 그가 출렁다리 건너기에 집중할 때 우리는 그 아래 절벽에서 낚시하는 곰을, 그 곰을 피하려다 더 큰 곰을 만나 놀란 물고기를 본다. 물론 아저씨도 뭔가 발견하기는 한다. 빨간 꽃나무를 보고서는 그 곁에 텐트를 친다. 오늘 밤은 그 곁에서 잠들 모양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점입가경이다. 아저씨가 텐트를 조립하는 사이 등 뒤에서 두더지가 고개를 내민다. 그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무서운 속도로 인물들이 추가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저씨는 느긋하게 불을 피우고 핫도그를 먹으며 숲의 고요를 즐긴다. 그러나 독자는 본다. 얼마나 많은 존재가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와 함께 존재하고 있는지 본다. 박쥐 떼와, 배트맨과, 개구리와, 사슴과, 왕개미와, 리본으로 팔다리가 묶여 스스로 선물이 되어 버린 산타와, 아저씨의 텐트를 사이에 두고 테니스를 치는 요정들과, 그리고, 또! 또! 또!
아저씨는 언제까지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알 것인가, 그에 비해 독자는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어디까지 목격할 것인가가 이 책을 팽팽하게 당기는 긴장의 핵심이다. 짐작은 일찌감치 접어 두는 게 낫겠다. 자연이 본래 그러하듯 그 하룻밤의 규모는 대단할 테니까. 이 재미있는 ‘어젯밤’은 결코 아쉽지 않을 만큼 웅장하게 멀리 간다. 책 속에서 검은 밤을 꽉 채우며 빛나는 무수한 흰 점들은 우주를 지탱하고 있는 너와 나를 비롯한 ‘그 밖의’ 존재들이다.
아저씨는 이 한밤의 재미난 일들을 몰랐을까, 알았을까. 눈으로는 못 보았겠으나 아마 몸은 알았을 것이다. 그가 아침 커피를 한잔하면서 “산속에서 잘 자고 일어났더니 한결 개운하다.”고 느꼈다면 그건 아마도 그는 인식하지 못했고 우리는 다 아는 그 유쾌한 에피소드들이 남기고 간 회복의 선물일 가능성이 높다. 책을 읽으면서 수많은 크고 작은 진실들의 호위를 받았기 때문일까. 독자인 나도 덩달아 마음이 개운하다. 진실의 입체적 영토를 지키고 싶다는 의지가 생긴다. 내일 밤에 또 누가 다녀갔으면 좋겠다.

글쓴이 김지은
1972년 서울 출생.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바람 속 바람」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평론집 『거짓말하는 어른』, 『어린이, 세 번째 사람』 등을 펴냈고 그림책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기억나요?』 등을 옮겼다.